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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3.1 만세투쟁 '잔혹한 살해'의 진실은?

'감춰진 항일독립투쟁사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야...

이호두 기자 | 기사입력 2014/06/07 [22:30]

일제의 3.1 만세투쟁 '잔혹한 살해'의 진실은?

'감춰진 항일독립투쟁사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야...

이호두 기자 | 입력 : 2014/06/07 [22:30]

'3월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속에 갇혀서도 만세부르며 푸른하늘 그리워 숨이 졌대요'
 
어린시절 음악교과서에 실려있던 '유관순 열사'에 관한 노래의 일부이다.

1919년 3월1일.
망국의 비탄에 젖어있던 조선 민중들은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를 비롯한 33인이 주도한 만세운동에 폭발적으로 참가하여 만세를 불렀고, 그 과정에서 이화학당에 다니던 여학생 유관순은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감옥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온전한 진실일까?

일제 순사들은 그저 만세운동하는 조선백성들을 지켜만 보다가 핵심인물들만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었고, 유관순 열사가 3.1만세 투쟁의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였을까?

▲ 독립기념관 내 비치된 일제의 고문장면     © 이호두 기자


저서 '이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다'의 저자인 박근창은 저서를 통해 '이화학당 출신 유관순'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했다.
 
박근창 씨에 따르면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옥중에서 사망하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기독교 세력이 교세확장을 위해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첫번째 증거로 그는 '유관순의 기혼여성의 머리모양'을 꼽았다.
 
▲ 이화학당에 유부녀가 다닐 수 있나? 유관순 수형기록표     © 인터넷

이화여대는 근 100여년간 재학시 결혼하면 퇴학을 당하는 교칙이 있어왔고, 전두환의 아내 이순자 조차도 의대재학 당시 전두환과 결혼하게 되자 학교를 그만둘 정도였다.
 
때문에 당시 이화학당 여학생이라는 유관순 열사의 '쪽진 머리'는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
 
그 뿐 아니라, 애초에 역사적 사실이 아닌 '유관순 전(傳)'으로서 교과서에 실려왔기 때문에 그간 생일, 키, 한문이름 등 다양한 오류가 지적되어왔음도 그의 논거였다.
 
유관순 열사는 일본 경찰에 붙들려 옥에 갇혀 만세를 부르다 숨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3,1 만세 투쟁때 우리는 '만세민중이 체포되어 경찰서에 산채로 이송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 으로 짐작하지만 실제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다 일제에 의해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당한 순국선열이 7천500명이나 된다'
 
일례로 3.1투쟁 증언 중 '여학생이 조선독립을 외치며 깃발을 흔들자, 일본 경찰은 장검으로 그 오른팔을 자르고 여학생이 깃발을 다시 왼팔로 바꿔들자 그 왼팔마저 잘랐다' 는 기록도 있다.

'이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다' 의 저자 박근창 씨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이화학당 유관순이 가장 열성적인 3.1만세 투쟁가로 묘사되면서 "오히려 더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된 열성 여성독립투쟁가의 실상이 가려지게 되었다"는 하나의 반론이다.

박근창 씨는 "기독교 세력에 의해 오히려 축소되고 감춰진 항일 독립운동사의 실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유관순 신화는 정밀 검증이 필요하다" 라고 주장했다.
▲ 장도를 닦는 일본 군인들     © 인터넷

유관순, 정치적,종교적 목적의 악용 논란을 다룬 [위키백과]의 내용을 보자

유관순 사후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 또는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덮기 위한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해 과도하게 띄워졌다는 견해도 있다. 반기독교운동가이자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대표인 김상구는 유관순이 사후 박인덕, 전영택, 일부 기독교인들의 선전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유관순 열사는 박인덕 등 친일 경력자들이 해방 후 자신의 전력을 덮고 개신교 선교 전략에 이용하는 도구로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주장한다. 서대문형무소의 유관순 기록과 당시 언론 보도 등 구체적인 자료를 일일이 확인해 내린 결론이다.

2011년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대표 김상구는 신간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해피스토리, 2011)에 유관순을 악용한 일부 기독교 세력에 대해 폭로하기도했다. 또 김상구는 '유관순을 친일 전력을 덮어주는 동시에 개신교의 선교 전략에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던 ‘시대의 아이콘’으로 이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화학당 출신 인사의 친일행적 은폐 의혹

박인덕 등은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 행적을 숨기기 위해 유관순을 미화, 신화화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있다. '기념사업을 주도한 박인덕이 자신의 일제말 친일행적을 유관순의 신화화를 통해 덮어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다. 유관순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후 박인덕의 주도로 기념사업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

유관순이 의도적으로 띄워졌다는 견해도 있다. 유관순 열사가 해방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해방 후, 친일 혐의자인 박인덕과 전영택이 한국판 잔다르크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 등의 이미지를 씌워 인위적 영웅을 만들었다는 의혹도 있다. 그리고 이화여전 출신 친일 인사들의 친일 행적을 은폐하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토막살인 루머 논란

조선총독부 경찰에 의해 토막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이 소문의 진위 여부는 현재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 일제에 의해 토막 살해당했다는 등의 ‘유관순 신화’가 만들어진 것은 박인덕이 그를 미화하기 시작했던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사인은 방광 파열 등 고문 후유증이었다.

유관순 신격화 배경

1946년 이화여고 교장이었던 신봉조와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은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았다. 당시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고의 교장으로 있던 신봉조가 동문 박인덕에게 ‘이화 출신 중에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하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하였다. 많은 항일 학생운동가들 중에서 유독 유관순이 선택된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의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있다.

신봉조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을 하면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조선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서며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다.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그들은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죄과와 친일경력을 가릴 방패막이로 삼으려 했는데, 이를 위해 그들이 선택한 애국열사가 유관순이었다.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박인덕과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은 유관순을 백년전쟁 때 잉글랜드에 몰려 수세에 처해 있던 프랑스를 구한 신화적인 여성영웅인 잔 다르크에 비유하였다. 유관순을 잔다르크에 비유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 존재로 각인시켰다.
 
3·1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대략 7천500여명이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더 잔혹한 방식으로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현장에서 살해당한 이들 마저 배제하고 유독 유관순만 특별하게 기억할 이유는 없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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