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인천 5.3 운동과 10.28 건대항쟁의 실패 이후 5공 정권의 엄혹한 민주화세력 탄압으로 정국은 얼어붙었다. 그러나 반전의 계기를 가져온 건 1987년 초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일명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발언 때문이었다. 당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생겨난 희대의 망언이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이다. 경찰의 발표는 "심문 과정에서 실토하라고 책상을 내리쳤더니 심장마비로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고, 이를 당시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문구가 바로 저 망언이다.
그런데 박종철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박종철의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개헌 논의는 곧 있을 1988 서울 올림픽 끝나고 하자"는 말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묵살했고, 국민들의 민심은 격앙되었다.
6월 10일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했다. 그리고 6월 9일. 전국 각 대학 학생들은 10일 집회 하루 전, 각 대학 교정에서 사전집회를 연다. 연세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천여 명이 노천극장에 모여 사전 집회를 진행했다. 당시 학생들은 '전두환-노태우 화형식'을 끝낸 후 교문 앞으로 진출하면서 사건이 발생했다. 교외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찰들은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사격한 최루탄이 연세대생 이한열의 후두부를 직격한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이었다.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지 1년이 지났다. 정치는 완전히 실종되었고,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법을 가장한 폭력으로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세력을 궤멸하려는 시도만 가득하다. 경찰은 건설노조와 민주노총 등을 향해 상식을 초월한 살인적인 폭력행위를 저지른다.
민생은 파탄 나고 있다. 경제 수치는 급전직하하고 있으며, 치솟는 물가고, 잇따른 전세 사기 등에 국민들은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은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면서 부자들에게는 감세를 해주고, 복지는 축소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심지어 복지를 민간에 이양한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한다는 구실로, 버젓이 욱일기를 단 일본 해군이 우리 영해를 넘어 부산항에까지 들어왔다. 우리 민족에 안겨준 처절한 고통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군국주의의 후예들이 다시 이 땅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윤석렬 정권은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어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국민들의 건강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해양 투기를 질타는커녕 오히려 앞장서 감싸주기에 급급하다.
윤석열 정권의 1년은 그야말로 위기의 시간이었다. 지지율은 1년 내내 바닥으로 내려 앉았고,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외침이 전국방방곡곡에서 퍼져 나가고 있다. 그 투쟁은 마침내 윤석열 정권에 대한 반대로 불붙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투쟁은 흩어져 있고, 윤석열 정권의 만행을 종식시킬 정도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다.
6월민주항쟁 36주년이다. 우리 국민은 4.19민주혁명, 부마민주항쟁, 518광주민중항쟁, 6월민주항쟁, 박근혜탄핵 촛불혁명이라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열사들이 유명을 달리하셨고,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다.
군사독재에 이어 사상 유례없는 검찰독재에 맞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야 하는 운명의 시간에 놓여있다. 모두가 힘을 내자. 그 길이 선배 열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을 물려주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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