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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인천 ‘살육’작전 지휘관 맥아더 동상 설치?

이득신 작가 | 기사입력 2023/09/04 [15:15]

육사,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인천 ‘살육’작전 지휘관 맥아더 동상 설치?

이득신 작가 | 입력 : 2023/09/04 [15:15]

 

▲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출처=맥아더 기념관  © 서울의소리

인천상륙작전의 총지휘관은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인천 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조선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펼친 상륙작전이었다. 보통 인천상륙작전을 제1차 세계대전 때 터키의 갈리폴리상륙작전,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의 노르망디상륙작전과 더불어 세계 3대 상륙작전의 하나로 꼽는다는 말이 있다. 세계의 수많은 전쟁 전투사에서 한반도의 내전에 불과한 6.25 전쟁의 인천상륙작전을 그리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영웅, 자유민주주의 수호신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인천 상륙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의 작전은 오히려 인천 ‘살육’작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 대한 평가는 과대포장 되거나 감추어진 측면이 다수 있다.

 

첫째, 그는 타고난 금수저였다. 그의 할아버지가 주지사였고, 아버지는 전쟁 영웅이었으며, 필리핀이 미국의 식민지였을 당시 필리핀 총독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어머니 핑키 여사는 아들을 위해 사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대단한 지원을 해주고 아들의 빠른 진급을 위해 상관들에게 수시로 승진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아들을 위해 일종의 압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이처럼 그의 주변 환경이 맥아더에게 매우 유리했다. 게다가 맥아더는 어머니의 극성으로 웨스트포인트를 수석 졸업하기도 했다. 금수저 집안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둘째,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누가 작전을 지휘하건, 당시의 전쟁 흐름상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그림이기도 했다. 6.25 전쟁이 개전된 이래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국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전선이 고착된다. 조선인민군은 낙동강까지 계속 승리하며 겉보기에는 유리한 상황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 듯이 쏟아 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미군은 이 전쟁에 참전한 초기에 조선인민군에게 연패하며 경상도까지 밀려 내려오다가 결국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이 뒤바뀌게 된다. 산지가 70%인 한반도의 지형은 보급로가 끊어지면 전차 같은 중장비를 몽땅 버리고 몸만 빠져나오기도 힘들어지는 형국이므로 결국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는 뒤집어 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전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군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구도였다는 것이다.

 

셋째,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너무도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그는 수많은 전쟁과 전투를 지휘하면서 민간인 사상자를 너무 많이 양산해 내기도 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하여 작전성공을 위해 덕적도 영흥도 팔미도 등 당시 섬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민간인을 대량학살하기도 했다. 덕적도에서 영흥도로 다시 월미도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이었다. 맥아더의 승인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실제 상륙이 이루어진 월미도에서만 민간인 수백명을 학살한 사건이기도 하다. 미군은 인천 상륙에 앞서 전투기로 월미도를 폭격했다. 사전 경고나 대책도 없이 풀 한 포기도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의 폭격이었고,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당시 폭격으로 월미도에 거주하고 있던 민간인 수백명이 사망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또한 미군은 월미도 서쪽에 설치된 북한군의 대공포 등을 제거하기 위해 수십 차례에 걸쳐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이와 함께 월미도 동쪽 민간인 시설 등에도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당시 미군은 1945년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 인천항에서 근무했던 미군과 항공정찰 전문가들을 통해 민간인 수백 명이 거주하는 마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곳에 민간인을 향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원주민들이 폭격을 피해 육지와 연결된 다리 쪽 갯벌로 피신했는데, 미군 항공기는 이들에게도 기총소사를 가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넷째, 맥아더는 전쟁광이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그는 오직 전쟁과 전투의 승리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의지와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하자 원자폭탄 투하를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했다.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미군에게 불리한 형국으로 흘러갔다. 이때 맥아더가 당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투하를 요청했고, 트루먼도 사실상 원폭투하를 승인해 주기도 했다. 다만, 그럴 경우 제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이라는 우려로 인해 원폭투하는 없던 일이 된 것일 뿐 원자폭탄 투하시 발생되는 민간인 피해는 전혀 감안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1949년 발효된 ‘전시 민간인 보호를 위한 제네바 협약’을 직접 위반한 사례였다. 맥아더에게 민간인 보호쯤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었고, 협약쯤은 무시해도 되는 종이쪽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섯째, 맥아더는 정치적 야심가이기도 했다. 맥아더가 한국 전쟁 승리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는 대통령에 대한 부푼 꿈 때문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으로 미국내 언론에서 집중조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언론들도 맥아더의 발언을 받아쓰는 것에 불과하여 2차 대전의 영웅 맥아더를 제대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한국전쟁의 승리를 통해 맥아더는 대통령에 도전하겠다는 야망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결국, 트루먼 대통령의 경계로 인해 대통령 꿈을 포기기에 이른다. 

 

맥아더가 57세에 낳은 늦둥이 외아들인 아서는 아버지의 소망과 달리 군인이 되지 않았고 맥아더라는 성마저 버렸다. 맥아더가 지은 시인 "아들을 위한 기도"는 한국에서 꽤 유명한데, 이 시의 주인공인 그의 외아들 아서 맥아더는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아예 자신의 성을 바꾸며 집안과 끊다시피 하고 잠적했으며, 친한 친척들하고만 연락이 되고 있고 다른 행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2000년에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도 언론에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쟁광 아버지의 지나친 승부욕과 비정한 모습으로 인해 가족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살았다는 후문이다.

 

육사 교정에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고 맥아더의 동상을 세운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맥아더가 한국군 출신도 아닐뿐더러, 인천상륙작전 당시 한국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사건의 중심에 맥아더가 놓여 있다. 육사는 무릇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라는 육군 장교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대한민국 국민 수백명을 학살한 맥아더의 흉상을 육사교정에 세워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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